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빈 곳의 바깥에서, 다시 / 임찬희

빈 곳의 바깥에서, 다시

by 신문선 2021. 8. 11. 20:31

본문

우리는 모두 꿈과 현실 사이에서 살아간다. 그가 누구든 어디에 누구와 살든 모두 현실 안에서 각자의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것이 인간이다. 특히 팬데믹의 상황에서 우리는 점점 꿈보다는 현실적 한계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미래와 꿈이 사라진 현재는 인간으로서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인간에게 꿈이 없는 현실은 어떤 의미인지 모두가 경험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동안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팬데믹 전까지 우리에게 한계는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날이 발전하는 테크닉과 테크놀로지, 쏟아지는 아이디어들, 열정적이고 창의적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고품질의 작업물들, 상품들. 그 어디에도 우리는 한계보다는 가능성과 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시대에 살고 있었다. 더불어 지금의 시대의 인간은 계속하여 배워야 하였다. 인간보다 빠른 시대에 우리는 빠르게 대응하고 대처해야 했다. 배우지 않으면 도태되었고 스스로에게 자조적이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할 수 있음을 과도하게 긍정했다. 그리고 팬데믹으로 우리의 손안에 있던 많은 것들이 그들의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곳에 작지만 수많은 빈틈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인류의 역사는 할 수 없음을 직면하는 역사였다. 역사 안에서의 개개인은 탄합받고 구속받았다. 희생을 요구당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지경을 현실이라 말하고 그 바깥을 꿈이라 말하였다. 여기에 현실은 그 시공간에 완벽히 구속되어 있다. 때문에 언젠가 또 다른 시공간에는 더 이상 한계가 아닐 수 있기에 우리는 희망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지금의 한계에, 나의 넓이에 조응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한계에 맞닥뜨려 있는가에 대해 생각한다. 그만큼이 우리의 현실적인 세계이기 때문이다. 한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의 삶을 꾸리는 우리를 마주 보고 있다. 이러한 지금의 우리는 어쩌면 과거로의 회기이다. 그것은 우리 무의식 안 언젠가의 기억으로의 돌아감이다.

이 어려운 가운데, 그 가운데 파괴되고 쓸모 없어진 것들, 그 빈 곳들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다시를 꿈꾼다. 다시는 회귀이다. 본래성으로의 회귀이다. 다시는 반복이다. 반복은 수고이다. 반복하는 수고와 그것의 방향으로 우리는 나아가고 변화한다. 그것은 마치 반복으로 나를 사라지게 하고 또 다른 예술적 자아를 발현시키는 것과 같다. 다시는 마주함이다. 나를 마주함이다. 다시는 돌아봄이다. 무심히 지나친 무언가를 말이다. 다시는 일상이다. 일상적 반복이다. 그리고 수많은 실패의 마주함이다. 나는 때문에 다시 나의 익숙해진 패턴을 비틀기를 원한다. 익숙하지 않기를 원한다. 그렇게 나는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의 작업은 다시 함으로 연속성이 생긴다. 이 "다시”의 행위는 수많은 두 번째를 새로운 첫 번째로 만든다. 발전과 창작을 위한 필수 요소이고 인간의 사유 과정이다. 반복은 순간과 같으며 또 영원과 같다. 사슬처럼 엮여서 존재하는 우주와 자연에 인간은 왜인지 창조를 통해 새로운 예술과 문화, 역사를 만들어 간다.

그리고 우리는 예술의, 음악의 본래적 성격을 다시 되짚는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껏 놓쳐왔던 수많은 잔재하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가 가능하여 더 이상 고려하지 않은, 또 무의식중에 불가능하다 판단하여 고려하지 않았던 수많은 빈틈들에 대해 말이다. 그렇게 나의 내면에 수많은 빈 곳이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에 그것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이렇게 우리는 시대와 흐름으로 필터링 된 빈 곳의 바깥에서, 그 고정관념 안에서 살아간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지에게는 이미 알려진 것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문에 잊음과 잃어버림이 일어나고 그래서 보통 우리와 가까운 것을 잊는다. 그렇게 변화와 발전의 기회와 시기를 놓치고 그렇게 고착화되어 나의 곁에 존재한다. 이미 고착화된 사항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건 그리 쉽지 않다. 우리는 항상 새로운 것을 원한다. 그 원함에는 죽음과 생명의 메커니즘에 그 뿌리가 있기에 거부는 쉽지 않다. 말하지만 새로운 것을 생각하는 것은 나의 비대해짐이지만 이미 알려져 나에게 고려의 대상이 아닌 것을 다시 생각하는 것은 나의 작아짐이다. 즉 사라짐을 거부하는 인간의 본성을 거부하는 것이다. 어쩌면 자기 거부이다. 자기 파괴이자 생성이다. 즉 창조적인 파괴이다. 우리는 무언가 다시 생각함으로 점점 날카로워질 것이다. 이것은 점점 비대해져가는 현시대에 대한 반항이고 독립된 주체로서 가야 할 길을 가는 예술가의 본성이자 본질이다.

어쩌면 소리는 예전부터 이 세상이 물질로만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많은 증거 중 중요한 하나였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있다. 그것이 어떤 존재의 증명이 될 수 있지만 스스로 하나의 존재라 말하기에도 애매하다. 때문에 우리는 다른 존재 - 타자의 소리와 항상 함께 하였고, 인류는 때문에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이것은 정신과 육체의 합일이고 본능적이다. 인지와 경험을 앞선 반사작용이고 신경이다. 우리는 종종 하나의 소리가 가진 방대한 정보에 대해서 잊고 지낸다. 그 정보는 다음과 같은 카테고리를 지닌다. 존재함, 존재의 공간, 존재의 움직임, 존재의 물질성(물성), 자연적 현상인지 자연의 존재인지, 존재와 현상의 상호작용 등이 그것이다. 그것의 인간으로서의 분석은 곧 인간의 원초적인 물음이었다. 왜냐면 그것은 그들의 삶과 생명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우리는 귀를 사용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보통 우리에게 공포와 위협의 대상이다. 날카로운 소리, 공포의 소리 또한 우리의 정신에 오롯이 새겨져있다. 그 공포와 위협으로부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는 들음에 대한 발전과 그것의 분석 및 활용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했다. 

또한 우리는 소리를 언어화하여서 서로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활용한다. 그곳에 서로의 정보 전달은 물론 감정이나 분위기, 그 사람의 특성 등을 모두 포함한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의 위험에서 벗어나려 노력하였다. 그렇게 공포와 죽음을 피하기 위해 날카로이 발전한 우리의 청각은, 때문에 청취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었을지 모른다. 때문에 인류는 아름다운 소리를 음악을 원했을지 모른다. 때문에 나에게 안정을 주는 소리와, 그것과 닮은 음악이 시작이었을지 모른다. 동시에 언어, 인식, 지각, 논리 너머에 있는 그 무언가에 대한 갈망으로 음악이라는 예술이 태어났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 안에 또는 밖에 숨어있는 인간의 흔적을 찾는다. 수 천년 전에도 있고 지금도 있는 그 인간 말이다. 우리와 공간의 관계에서 그 공간이 스스로 창출해내는 의미를 받아들인다. 그 공간의 의미는 곧 시대를 관통하는 인간의 정신이자 본질이다. 그 제각각의 공간에서의 소리들은 제각기 다른 울림을 가진다. 그 공간과 그 울림의 성격과 질감에 따라 나는 정신적으로 작거나 또는 큰 존재가 된듯한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또는 안정과 불안, 안전과 불안전 등의 정서적 반향을 일으킨다. 울림 공간을 통한 거대하고 따뜻한 음향의 제작은 곧 나 스스로를 큰 존재로 만들고, 그 반대는 나를 작은 존재로 착각하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공간에서의 소리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기에 우리는 함께 그 소리 공간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음악을 들을 때만 갑자기 일어나는, 떠오르는 정신적인, 무의식적인 반응이 있음을 안다. 그것은 우리에게서 역동적 에너지를 발생시킨다. 음악을 들음으로 울고 웃게 한다. 그 감정의 움직임이 일어나는 이유는 음악은 시간과 공간을 해체하여 우리를 과거로, 기억의 어딘가로 데리고 가기 때문이다. 잠재된 무언가를 마주하게 하는 매개체이다. 그렇게 때론 음악은 우리를 무아의 상태로 만든다. 나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나의 사회에 폭력을 가한다. 마치 꿈의 실상처럼 말이다.

현실이 있음은 곧 가상이 있음이다. 또한 현실 역시 우리의 상상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우리는 우리의 체계로 사회를 이룬다. 우리의 정신과 마음, 이성으로 우리의 현실이란 것을 가상으로 만든다. 그러한 우리의 현실을 가장한 가상이 빠진 현실은 무엇인가. 그곳엔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 부재는 남겨진 이들로 다시 재창조되고 해석된다.

소리와 음악, 그 둘의 관계는 어떨까. 전통적인 소리의 기본적인 형태는 Attack 이후 점점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음악은 전반적으로는 점점 상승하는 형태를 띤다. 이 둘은 서로 반대의 형태를 가지고 있고, 또 서로 있어야만 하는 존재이다. 서로가 서로의 집이 된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헐거워진 부분, 닳아 없어진 부분은 새로 만들어야 할 테다. 즉 서로가 서로의 빈 공간이고, 또 채움이다. 서로는 서로의 바깥이며 동시에 알아감이다. 서로 다르기에 낯설다. 그리고 그러한 소리와 음악은 인간과 가까운 친구이지만 언제나 타자로서 존재한다. 언제나 어느 정도의 거리가 서로의 사이에 존재한다. 때문에 우리는 한 명의 예술가로서 음악과 우리와의 거리를 때로는 아주 가깝게 또는 아주 멀게 만든다. 다양한 소리 세계를 더더욱이 구체화하여 너무나도 서로 낯선 음악을 감상으로서가 아닌 오히려 체험으로서 접하게 한다. 닿을 듯이 가까울 때 느끼는 낯섦과 두려움, 상상조차 못 할 듯이 멀 때 느끼는 경이로움과 숭고함, 어쩌면 우리는 음악을 통해 - 음악 안에 있는 인간의 예술적 시도와 행위, 희망과 좌절을 통해 - 새로운 종류의 감각을 얻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케 한다. 그것으로 우리는 진정 우리 내면에 있는 음악에 대한, 예술, 사회, 자아, 삶에 대한 생각의 지경이 넓어지길 원한다. 이 모든 예술적 상황을 가상의 세계로 인식하고 그 안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부정하고 또 다른 예술적 자아로 나아가길 원한다. 이 모든 상황은 예술가로서의 의지의 힘으로 나아가고, 그렇게 도달할 섭렵될 그곳에 상처를 이겨내고 깨어진 자아가 탈시성(Metapoetry)의 형태로 존재할 거라 믿는다. 하지만 이것의 전제 조건은 우리는 음악의 집이고, 음악은 우리의 집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이해와 철학, 창의력이 부재한 창작은 모래성을 쌓는 것과 같다.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가지고 하는 작업으로 만든 작품은 마치 모래성과 같다. 쉽게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것을 위한 거부할 수 없는 과정이기도 하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물거품이 됨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동시에 물거품이 되지 않으려 발버둥 쳐야만 한다. 한 번의 이벤트가 무엇을 의미할까. 어쩌면 이 하나의 사건이 이 세상의 물거품이 될까, 아니면 이 물거품을 만드는 회오리가 우리 내면의 먼지와 찌꺼기를 걷어낼까.

우리는 우주와 닮아 우리의 범주는 지경은 하나의 자연으로서 팽창한다. 늘 인간이기에 우리는 발전한다 말하지만, 우리는 거역할 수 없는 우주의 한 존재일 뿐이고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면 그뿐이다. 허무와 센티멘털을 논하는 지금의 우리는 극도의 성장으로 가능한 귀족적 엘리트적 감상이다. 예술을 취미로 삼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기에 모든 것의 흥미와 가치가 사라지는 지금의 시대에 우리는 어디에서 예술적 가치를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낭비의 시대에 결핍으로 산다는 것에의 슬픔과 함께 한다. 이 언밸런스는 또한 우리의 역사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물질로 도배된 시대에 우리는 전혀 물질적이지 않은 소리로 소리 없이 반항하려 한다.

우리 인류는 온 우주에 대해 3퍼센트 미만을 알고 있다고 한다. 기사를 통해 접한 이 소식은 우리에게 그 바깥에 있는 남은 97퍼센트의 안 알려짐, 잠재성,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하였다. 무한한 꿈을 꿀 수 있게 하였다. 비단 과학과 물리에 대한 안 알려짐뿐 아니라 우리는 현대를 살아가며 계속 새로운 우리를 깨닫고 배우듯이 인간, 그의 내면, 정신과 심리, 사회, 문화, 사유, 철학, 예술, 미학 등의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지만 이미 존재하는 97퍼센트의 그것을 인지한다. 그 미지의, 어둠의 공간을 향한 인간의 예술가로서의 도전과 항해를 위해 우리는 나의 바깥에서 더 바깥을 바라본다. 이렇게 Post-postmodernism 시대의 시작을 껴안는다. 예술적 미지의 공간으로 나아가 내가 나의 존재로서 움직임을 일으킨다면 새로이 함께 깨어난 시간과 그 지평 위에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소리와 음악이 펼쳐질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희망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우리의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우리는 수많은 내 안의 빈 곳과 내 바깥의 빈 곳에 다다름을 갈망한다. 마치 소리처럼 내 바깥과 내면의 빈 공간을 망설임 없이 채워지길 바란다. 빈 곳의 바깥에는 갈망과 주저함 사이의 내가 있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내가 있다. 가능성과 불가능성, 꿈과 현실, 실재와 이상, 있음과 없음, 정신과 물질, 시작과 끝 사이의 내가 있다. 이 모든 게 나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결국엔 이겨냄으로 나의 끝을 넘어섬으로, 끝의 끝남으로, 진정 새로운 시작을 하길 고대한다. 팬데믹의 시작으로 숨죽이며 끝을 기다린, 끝남을 끝낼 우리의 자랑스러운 이들과의 일상의 회복을, 그럼으로 다시 회기하고 다시 나아가길 희망한다.

프로젝트 앙상블 모프의

<빈 곳의 바깥에서, 다시>에 대한 글

임찬희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